정신질환 환자들은 흔히 특정 병명을 정체성으로 갖고 있다. 이것은 가히 최면이자 집착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내 주변의 예를 들어보면 이렇다. 친구 A는 조울증과 ADHD 진단을 모두 갖고 있다. 그런데 A는 조울증은 예전에 진단받았고, ADHD는 나중에 진단받았다. ADHD를 진단받고 난 이후 A는 사실 자신은 조울증 환자가 아니라 ADHD 환자였다면서,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문제의 근원이 모두 ADHD라는 병에 있었다면서 자신이 조울증으로 진단받은 것은 오진이었다고 확신한다. 내가 본 대부분의 정신 질환 환자들이 그렇다. 물론 나도 포함해서.
나는 내가 경계성 인격장애(Borderline Personality Disorder, 약칭 BPD)로 진단받았다는 것에 천착하고 있다. 정신질환을 치료받기 시작할 맨 처음에는 우울증으로 진단받았고, 그 이후에는 조현병이었다, 그다음은 1형 조울증이었고 마지막으로 받은 진단명은 경계성 인격 장애와 급속순환형 양극성 장애(급속순환형 조울증)이다.
나는 오늘 현재 내가 갖고 있는 경계성 인격 장애에 대해서, 내 경험과 내 주변의 많은 BPD 친구들의 경험을 버무려서 글을 써보려고 한다. 통계와 책을 참고한 부분도 있지만, 일반화할 수 없는 경험으로 쓴 부분도 많기 때문에 이 글을 의료적 사실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BPD라는 진단명에 천착하는 이유는 나를 가장 잘 설명하기 때문인데, BPD의 진단 기준은 다음과 같다. 이 설명은 학지사의 이상심리학 시리즈와 MSD 메뉴얼을 참고해 내가 다시 쓴 버전이다.
- 유기불안과 거절(비판)에 대한 두려움
- 극단적이고 불안정한 대인관계
- 혼란스러운 정체감과 왜곡된 자아상
- 만성적인 공허감
- 충동적이고 유해한 행동
- 반복되는 자해, 자살(자살 가장 행위 포함)
- 엄청나게 빠른 기분 변화 및 통제하기 어려운 강렬한 정서
- 격렬한 분노 및 분노 조절 어려움
- 극단적 스트레스에 의해 발발하는 해리 증상과 편집증
보통 이 중에 과반 이상이 해당되면 BPD로 진단을 내리는 데, 나는 이 중 해당하는 8개의 증상이 있고, 1개의 기준도 긴가민가하지만 어느 정도 해당된다.
참고로 BPD 의 경계성은 경계선이라는 말로 치환되기도, 인격장애는 성격장애라는 말로 치환되기도 한다. 물론 뜻은 다 똑같다.
BPD의 전체 명칭인 Borderline Personality Disorder는 영어를 직역해도 경계선, 경계성 인격장애인데, 영어권에서는 이 병명이 핵심을 잘 드러내지 못하고 환자들에 대한 낙인을 강화한다는 이유로 당사자 집단과 의료현장에서 Emotionally Unstable Personality Disorder(약칭 EUPD)로 바꾸자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EUPD를 직역하면, 정서 불안정 인격장애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둘 다 어떤 측면을 더 잘 드러내는지가 다르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BPD라는 이름은 2,3,4,9의 진단 기준을 더 잘 드러내는 것 같고, EUPD라는 이름은 1,5,6,7,8의 진단 기준을 더 잘 드러내는 것 같다.
1. 유기와 거절에 대한 불안감
첫번째 진단기준인 유기불안에 대해 말해보자면, BPD환자들은 버림받는 것(유기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버림받을 것이라는 생각을 항상 갖고 있다. 그래서 버림받을까봐 관계를 지속하는 내내 불안해한다. 또, 버림받지 않으려고 어떤 노력이든 한다. 다만 그 노력은 나에게도 타인에게도 해로운 경우가 많다. 이 유기불안은 부모님이나 형제자매를 향할 때도 있고, 애인이나 친구를 향할 때도 있는데 보통은 애인을 향해 가장 많이 작동하는 것 같다. 부모나 친구와는 관계를 끝낸다는 개념이 드물지만, 애인 관계에서는 '헤어짐'이라는 확실한 관계의 끝맺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BPD환자들은 연애를 하게 되면 애인의 사소한 말 하나하나에 의미 부여하고 집착하고는 한다. 그리고 이런 행동은 유기불안과 관련이 있다.
아마 자기혐오가 짙은 내향인들도 남들이 자신을 싫어하는지 아닌지 많이 신경을 쓸 거라고 생각하는데, 차이점은 BPD 환자들은 '버려진다'는 생각에 매몰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버려진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그것을 너무 너무 두려워한다. 이 유기불안은 행동으로 표출될 때도 있고, 어떤 환자들은 머릿속으로 유기 상황을 끊임없이 시뮬레이션을 돌리면서 혼자서 괴로워하기도 한다.
BPD 환자들은 흔히 애인이 바람을 피는지 계속 의심하고 상상하고 괴로워하고, 질투에 매몰되어 애인을 괴롭게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기저에는 '얘가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되면 분명히 나를 버릴 것이다'는 생각이 숨어 있다. 그래서 BPD 환자들은 갖은 노력을 다 한다. 애인에게 간이고 쓸개고 빼줄 듯이 잘해주기도 하고, 싫은 점이 있어도 말하지 않고 꾹 참기도 하고, 또 애인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기 위해 "아파지기도" 한다. 사실 이런 측면은 의존성 성격장애 환자들과 비슷하기도 하다. 다만 의존성 성격장애 환자들은 타인에게 자신의 삶을 의탁한다는 점, BPD 환자들에 비해 폭발적인 정서가 덜하다는 차이가 있다.
위에 글만 읽으면 비피디 환자들이 버려지는 게 두려워서 절대 작별을 먼저 고하지 않고, 무조건 상대방에게 매달릴 것만 같지만, 딱히 그렇지도 않다. 비피디 환자들은 다들 다양하고, 유기불안이 심해지면 "내가 분명히 나를 버릴 거니까 그전에 내가 너를 먼저 버려서 니가 나를 버리지 못하게 만들 거다"라고 생각하고 헤어지자고 자주 말하는 이들도 있다. 물론 이런 극단적인 작별 선고 이후에 감정이 회복되면 다시 만나자고 하는 일도 반복된다. 이렇게 헤어지자고 했다가 관계를 완전히 끊지 않고 만났다가 다시 헤어지자고 하는 이런 행동을 빈번하게 반복하기도 하는데, 영어권에서는 경계성 인격장애자들의 전형적인 이런 행동을 후버링(Hoovering)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위에 말한 "아파진다"는 말이 이해가 안 갈 수도 있다. 아파진다고? 버려지기 싫어서 아파진다는 게 무슨 말이지?
내가 아파진다는 말을 의도를 가진 채로 행하는 것처럼 써놨지만, 정신질환의 신체화 증상은 실체가 있다.(이것은 단순히 내 주장이 아니라 정신의학적 사실이다. 알고 싶은 분은 신체 증상 장애를 검색해보면 된다) 이 유기불안으로 인해 나타나는 '아파짐'은 유기불안으로 인해 정신병이 심해져서 아파지는 것도 있고, 유기불안의 대상에게 돌봄을 유도하려는 것도 있다. 아픈 사람을 버리기는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 돌봄을 통해 상대방이 사랑을 증명하도록 하고 싶은 욕망이 이 BPD 환자들에게는 있다.
또, 비피디 환자들은 일상생활에서 사소한 거부나 비판을 감당하기 어려워한다. 이것을 버려진다는 개념과 연결 짓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상사가 자신의 결과물에 "이거 좀 이상한데, 다시 해봐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 기분이 나쁘고 스트레스를 받겠지만, 아마 다시 한번 그 작업물에 임해볼 것이다. 비피디 환자의 경우 거부당했다(그 사람은 앞으로 나를 싫어할 것이다)는 느낌과 함께 극렬한 수치심과 자기혐오와 분노를 느끼고(7번의 진단기준과 연결) 얼굴에 열감이 오르고 손발에 땀이 나고 집중이 안되고 도망가고 싶은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비피디 환자들은 충동적인 행동을 많이 하는데, 이런 상황에 놓이면 도망가고 싶은 기분을 느끼는 것만 아니라 그냥 도망갈 수도 있다.(5번의 진단기준과 연결) 그리고 거부, 비판에 대한 비피디 환자의 정서적 반응은 보통 부적절하다. 한마디로 보통 사람이라면 사실 감정적으로 그만큼 힘들 일이 아닌데 매우 강렬하게, 또 오랜 시간 고통스러워한다.
2. 극단적이고 불안정한 대인관계
2번째 진단 기준인 극단적이고 불안정한 대인관계란 이런 것이다. BPD 환자는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많은 경우(내 주변을 일반화했다.) 외양, 말투, 태도 등에 매력을 갖고 있어 처음 만날 때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특성이 있고, 결국 사람들과 쉽게 친해지고, 쉽게 멀어진다. 이것은 BPD환자가 주체적으로 행한다기보다 그들의 성향 때문이다. BPD 환자는 어떤 사람들과 처음 만났을 때 그들을 이상화하고, 그들이 세상에서 최고로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관계를 엄청난 속도로 마구 마구 발전시킨다. 하지만 아주 사소한 일로 그 사람이 세상에서 둘도 없는 쓰레기라고, 그 사람과 다시는 가까워지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이런 극단적인 이상화(Idealization)와 평가절하(Devaluation)는 경계성 인격장애자의 전형적인 증상이다. 이런 일은 끝없이 반복되고, 곁에 있는 사람들은 이런 BPD 환자들을 견디기 어려워한다.
그래서 BPD 환자들에게 안정감을 주고 지속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방법은, BPD 환자들이 너무 빠른 속도로 다가와도 그 속도에 따라가지 말고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며 내가 너와의 관계를 끊는 일이 없이 여기 항상 있다는 생각을 심어주는 것이다. 이런 거리두기를 포함한 관계 맺기는 BPD 환자에게 적용되는 여러 심리 치료법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극단적이고 불안정한 대인관계는 7번의 진단 기준인 '엄청나게 빠른 기분 변화 및 통제하기 어려운 강렬한 정서' 맞물려 엄청난 시너지를 낸다.
BPD 환자 A를 처음 만나게 된 일반인의 예를 들어보자. A는 처음 만난 날부터 나에게 너무 잘해주고,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끊임없이 칭찬하며 나와 친해지려고 애쓴다. 나와 함께 있는 A는 정말 행복해 보인다. 나도 매력적이고 나에게 이렇게 잘해주기까지 하는 A가 좋기 때문에, A와 친해진다. 그리고 만난 지 며칠 만에 우리는 세상에서 둘도 없는 친구 혹은 썸의 관계가 된다. 그런데 내가 A의 행동에서 불편한 지점에 대해 배려와 완곡어법을 곁들여 말한다.(꼭 이런 일이 아니더라도, A의 기분을 거스르는 아주 사소한 일이면 다 비슷하다.) A는 이해가 안 갈 정도로 엄청나게 분노하고 슬퍼하고 힘들어한다. 나에게 험한 말도 퍼붓는다. 내가 A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하자 하루도 안되어 A는 기분이 좋아지고, 사실 그럴 일이 아니었는데 자신이 말이 심했다며, 원래 지내던 대로 지내고 싶다고 한다. 아니면 내가 사과하지 않아도 혼자서 기분이 좋아지더니 나에 대한 태도를 다시 긍정적으로 바꾸는 경우도 있다. A와 함께 있으면, A가 과하게 신나 있고 즐거운 모습, 화내는 모습, 죽고 싶어 하는 모습을 짧으면 몇 십분 만에 모두 볼 수 있다. (물론 웬만큼 친해지지 않으면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 환자들도 있다. 환자들에 따라 이런 증상을 나타내는 대상의 범위가 다르다.) 이런 감정 상황은 나와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A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은 사람, 나의 구원자라고 말했다가 다음날에는 내가 쓰레기라고 한다. 그리고 이런 일은 한 번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 A와의 관계를 지속하는 중에 끊임없이 일어난다.
당신은 과연 이런 모습을 계속 보이는 A와 계속 가까운 관계로 지낼 수 있는가? 솔직히 환자 당사자인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게 우습지만, 나는 BPD를 앓고 있는 사람(나 포함)이랑은 애초에 일정 선 이상으로 가까워지지 않는 게 이득이라고 생각한다.
참고로 영어권에서는 환자들이 이런 극단적인 이상화와 평가절하를 번갈아가며 나타내는 것을 분열(splitting)이라고 부른다.
3. 혼란스러운 정체감과 왜곡된 자아상
흔히 BPD 환자들은 이런 말을 많이 한다.
내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다.
혹은
나는 분명히 확실하게 어떠어떠한 사람이다.
BPD 환자들은 당신이 어떤 사람이냐고 물어봤을 때 대답을 잘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도 그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보통 이 진단 기준에 잘 부합하는 환자들은, 자신이 그때 그 때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따라,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말하는지에 따라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가 달라진다고 말한다. 그들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 갈피를 잡지 못한다. 만약 그들이 나는 어떤 사람이다!라고 확신을 주어 말했더라도 다음 날에 물어보면 어제와는 다른 말이 나온다. 이런 점 때문에 BPD 환자들은 거짓말쟁이라는 오해를 받기도 하는데,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 그때는 정말로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그 생각이 끊임없이 바뀔 뿐이다.
이해하기 쉬운 예를 들어보면 평소에 마라탕을 좋아하지만 가끔은 먹고 싶지 않아 하는 일반인 A와 BPD 환자 B가 있다고 해보자.
마라탕 좋아해? 먹으러 갈까? 하고 물어보면
A는 "응, 좋아하는 편이야" "좋아" "지금은 안 먹고 싶어" 등으로 답할 것이다. 하지만 B는 그때 마라탕이 먹고 싶으면 "응 나 마라탕 진짜 좋아해!" 하고 말하고 그 때 마라탕이 먹고 싶지 않으면 "나 마라탕 싫어해"라고 말한다.
BPD 환자들은 이런 식으로 자신을 총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말하는 언어를 제대로 구성하지 못한다. 또, 극단적인 정서를 보이기 때문에 과장을 곁들인 극단적인 표현을 많이 사용한다. 위와 같이 "응 나 마라탕 진짜 좋아해!"라는 말처럼, 항상 극단적으로 말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주변 사람도 BPD 환자 곁에 있을 경우 어느 장단에 발을 맞춰야 할지 몰라서 곤란해한다.
이런 BPD 환자와 관계를 잘 유지하는 방법의 우선 첫 번째로 그들이 이런 식의 언어와 행동 양식을 보인다는 걸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일관성이 없는 언어 자체가 병의 증상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대처 방법 중 하나로는 그 모순을 부드럽게 알려주며 BPD 환자들이 자기 자신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줄 수도 있다. "저번에 하던 말이랑 틀린데?"라고 말하면 많은 환자들은 자신이 공격당했다고 생각하며 극렬한 정서적 반응을 보일 가능성이 있다. "저번에는 마라탕이 먹고 싶었는데, 오늘은 안 먹고 싶은가 보네." 정도면 아마 많은 환자가 그들도 자기가 한 말에 어떤 모순이 있었는지 인식할 것이다.
이제부터는 개인적으로 혼란스러운 정체감이나 왜곡된 자아상이 나에게 어떻게 나타났는지 써보려고 안다. 많은 정신질환자들이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을 읽고 자기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나도 그랬다. 다자이 오사무의 자전적 소설 '인간실격'에는 끝이 없는 아주 깊은 우울감을 지닌 주인공이 나온다. 주인공은 사람들과 있을 때 한 번도 편하게 자신을 놓지 못하고, 가면을 쓰고 자신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친구들을 웃기는 것에 기뻐하면서, 또 자기 자신이 아닌 그 모습에 괴로워하면서 남의 기준에 맞춰 살아간다.
나는 학교 친구를 만날 때의 내 모습과 학원 친구를 만날 때의 내 모습이 달랐고, 그 와중에도 같은 반 친구와 다른 반 친구를 만날 때 달랐고, 심지어 같은 반으로 묶여 있어도 이 무리에서는 착하고 똑똑한 아이였다가 다른 무리에 가면 웃기고 멍청한 애가 됐다. 누구와 있느냐에 따라 외향적이 되기도 했고, 내향적이 되기도 했다. 딱히 내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었다. 보통 사람들은 처음 만나면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를 파악하고, 분위기를 본다. 이때 첫인상으로 서로를 파악하고 누구누구 씨는 어떤 사람인 것 같아요~라는 의견이 나온다. 그러면 나는 그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그 껍데기가 나인 것 마냥 행동했다. 그래서 내 껍데기를 각기 달리 알고 있는 사람들과 같이 만났을 때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너무 혼란스러웠고, 원래 알고 있던 내 껍데기와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되면 내가 발가벗겨진 것 마냥 수치스러워서 죽고 싶었다. 그래서 그런 일을 최대한 만들지 않으려고 했다.
이런 성향은 내가 갖고 있는 옷에도 반영되어 있는데, 내가 가진 옷들은 통일성이란 게 없다. 펑퍼짐한 시골 소녀 느낌의 아메카지 룩, 몸에 딱 달라붙어 섹시한 느낌을 주는 골지 원피스, 세미 정장 같은 검은색 블레이저, 나풀나풀 거리는 하얀색 주름치마, 형광빛의 원색 티 몇 벌, 전혀 튀는 느낌을 주지 않는 무지 색 티와 바지 몇 벌, 짧은 돌핀 팬츠, 이상한 길이의 반바지, 하이웨스트 오버핏의 찢어진 청바지, 어깨를 드러낸 사탕껍질 같은 프릴이 달린 블라우스, 아무런 장식이 없는 면접에 갈 때나 입을 것 같은 하얀 블라우스.
사실 다양한 상황에 적절한 옷을 입어야 하는(TPO) 현대인이라면 옷장이 서로 다른 스타일의 옷들로 채워진 게 뭐가 이상하고 그게 왜 정신질환의 진단 기준이 되냐고 물을 지도 모르겠다. 사실 옷을 많이 사는 사람이라면 옷장 속이 충분히 다채롭고 어지러울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옷이 자신의 정체성을 반영하고 있는지 아닌지가 중요하다.
나는 그날 입는 옷에 따라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달랐다. 몸에 딱 달라붙는 골지 원피스를 입고 하이힐을 신으면 괜히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내가 남자를 홀리는 여우인 것처럼 굴었다. 찢어진 청바지와 펑퍼짐한 티와 오버핏 가디건을 입으면, 내가 세상의 자유를 만끽하는 히피인 것처럼 담배를 물고 바람을 쐬며 걱정할 것은 아무것도 없단 듯이 굴었다. 어쩌다 세미 정장을 입게 된 날이면 미루고 싶은 충동도 없이 카페에 가서 해야 될 작업을 빨리 해내면서, 나는 유능한 전문직 여성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나는 내가 밖에 나갈 때는 입지 않는, 때가 지고 헤진 옷을 대충 주워 입고 글을 쓰는 중이고, 내 주변에는 아무도 없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글을 쓰는 블로거...? 경계성 인격장애자...? 스물 몇살..?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대부분의 비피디 환자들은 이에 적극적으로 공감할 것이다. 비피디 환자들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정해져 있지 않고, 그때 그 때 기분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따라 휙휙 바뀐다. 사람들 앞에서 가면을 쓴다는 점은 연극성 인격장애와도 공통되는 부분이 있는데, 연극성 인격장애의 가면 증상은 보통 충동적이고 불안정하기보다 사람들 앞에서 일관된 모습을 꾸며내고, 드라마틱한 감정을 드러내며, 사람들의 관심을 얻기 위한 아양과 애교에 가깝다.
또, 경계성 인격장애자들은 이러한 혼란스러운 정체감 때문에 자기 자신을 보는 시선이 매우 왜곡되어 있다. 한 마디로 경계성 인격장애자들이 바라보는 자기 자신의 모습은, 남들이 보는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그의 모습과는 현저히 다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예를 들어 남들은 다들 외모가 준수하다고 말하는데 그 자신은 자신이 너무 못생겼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오히려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착각이라는 말이 이런 왜곡된 자아상을 설명하는 한 단어가 된다고 생각한다. 좋은 방향의 착각이든, 나쁜 방향의 착각이든 말이다.
4. 만성적인 공허감
만성적인 공허감이란, 정서적 충족감을 느끼기 어려운 것을 말한다. BPD 환자들은 강렬한 감정을 느끼고, 감정적 고통이 오래 지속되지만, 긍정적 감정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무엇을 해도 마음이 텅 빈 느낌이 든다. 현실감이 없다고 표현하기도 하고, 삶에 미련이 없다고 표현하기도 하고, 이렇게 살아서 무엇하나, 왜 살고 있나, 사람들은 대체 왜 사는가, 무얼 해야 꾸준히 즐겁고 만족하고 정착할 수 있을까.... 등등의 얘기가 나온다.
그래서 환자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채워줄 무언가를 찾는다. 그것은 연인 관계일 수도, 섹스일 수도, 술일 수도, 쇼핑일 수도, 도박일 수도, 게임일 수도, 인터넷 커뮤니티일 수도 있다. 이렇게 들으면 일반인과 별 달리 차이가 없는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BPD 환자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충족감을 느낄 수 없고, 느낀다고 해도 금방 증발해버린다. 그래서 행복하지 않고, 항상 무언가에 중독되어 있고, 빠져있고, 집착하고, 자기 자신을 조금이라도 채우기 위해 끝없이 노력한다.
예를 들어 BPD 환자들은 만성적인 공허감을 채우고, 끊이지 않는 정서적 고통에서 도피하기 위해 물건을 사는 것을 그 수단으로 택하는 경우가 꽤 많다. 인터넷 쇼핑이 고도로 발달한 시기에 보기만 해도 구미가 당기는 물건을 손가락 하나로 주문하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 물건 중 십중 팔구가 실제로는 필요 없는 것이다. 그렇게 집에는 짐이 쌓여가고, 통장 잔고는 줄어들고, 종국에는 카드빛이나 사채에 손을 대는 일도 벌어진다.
섹스 중독의 경우에는 하루 종일 음란한 생각에 빠져 있거나, 인터넷에 사진을 올리거나, 끊임없이 채팅으로 음란한 메세지를 보내거나, 음란물을 보거나, 섹스를 할 상대방이 있다면 하루 종일 섹스를 하는 등의 중독이 있다.
(물론 음란한 생각, 행위나 BDSM 성향이 뇌 속 신경전달물질과 매우 높은 관련이 있고, 이걸 치료가 필요한 질병으로 바라봐야 하는지는 아직 해외에서도 논의가 분분한 사항이지만 위에 언급한 비피디 환자의 섹스 중독은, 병으로 인한 만성적인 공허감에서 도피하기 위한 행위라고 가정했다.)
나는 사실 이 진단 기준은, 주변인한테 보고 듣고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정도이지 완벽히 충족하지는 못한다. 나는 현재 기준으로 내게 구원자라고 여겨지는 사람이 있고, 끊임없이 돌봄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랑이 내 공허감을 채워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병이 싹 다 나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자살과 자해 시도가 크게 줄었고, 삶 자체도 궤도에 올라 이런 글도 쓸 수 있다.
5. 충동적이고 유해한 행동
충동적이고 유해한 행동은 가히 자해, 자살 행위의 세미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유해한 행동은 타인에게 유해한 행동일 수도 있지만, 보통 환자 자신에게 유해한 행동을 말한다. 보편적인 유해한 행동으로 자퇴, 퇴사, 폭음, 폭식, 분수에 맞지 않는 소비, 원나잇 등이 있다. 예를 들어보면 이렇다.
BPD 환자들은 갑자기 충동적으로 학교를 자퇴하거나 직장을 그만두거나 중요한 일을 갑자기 내려놓는 경우가 있다. 이는 지속적으로 봤을 때 분명히 유해한 행동인데, 그냥 그때 충동적으로 그러고 싶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그만두는 것이다. 이런 행동의 이유는 정서적 고통이 반복되어서 그런 경우도 있고, 남들의 돌봄을 받기 위한 부분도 있다. 이런 행동을 반복하다 보면 경계성 인격장애자들의 삶은 점점 망하는 소용돌이로 흘러들어가게 된다....
한 번에 만취를 넘어 토하고 의식을 잃는 상태가 지속될 때까지 술을 계속, 자주 마시기도 하고,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양보다 훨씬 많은 양을 먹고 토하고 또 다음날은 굶는 행동을 반복하기도 한다. BPD 환자는 알콜 등 물질 중독 장애를 앓을 확률이 높고, 여성 BPD 환자는 섭식장애를 함께 갖고 있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BPD 환자들 중에 섹스 중독인 사람들은 원나잇을 자주 한다. 충동적인 행동이지만 일반적으로는 유해한 행동은 아니라고 바라볼 수도 있다. 하지만 BPD환자가 원나잇을 끊임없이 하는 이유는 맘에 드는 사람과의 섹스 행위 자체가 즐거워서라기보다 인격장애에서 발현된 여러 정서적 역동을 반영하고 있다. 예를 들어, 원나잇은 보통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고 여겨진다. 그래서 이 일탈 행위에서 해방감을 느끼고 그게 정서적 고통을 잊게 해 주고 잠시간 공허감을 채워주기 때문에 원나잇을 할 수도 있다. 어떤 여성 BPD 환자는 못생긴 남자를 만나 불쾌한 기분으로 섹스를 하는, 자해에 가까운 행위를 즐길 수 있다. 어떤 남성 BPD 환자는 여러 여자와 원나잇을 하면서 자신이 여자들을 '수집'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 행위를 통해 잠시나마 공허감에서 탈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전인격적 관계가 포함되지 않은 이런 섹스 중독 행위는 도피 수단이기 때문에 결국 장기적으로 공허감을 더욱 강화한다.
6. 반복되는 자해, 자살(자살 위장 포함) 행위
이런 행동은 6번의 진단 기준과 관련이 있는데, BPD 환자들은 숱한 자해와 자살 시도 행위를 보인다. 이렇게 말하면 꼭 BPD 환자들이 관심받으려고 자해와 자살시도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보통 극단적인 감정 상태에 있을 때 그를 완화하기 위해 자해를 하기도 하고, 너무 심한 해리 증상으로 인해 그를 깨고 현실로 돌아오기 위해 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상황들은 유기불안과 극렬한 정서 변화로 인한 고통에 의해 촉진되는 면이 있다!
자해 행위
돌봄받는 것을 좋아하는 비피디 환자들은 눈에 보이는 자해 행위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내 주변에 경계성 인격장애로 진단받은 친구들은 자해흔을 모으는 것을 좋아한다. 나도 이런 짓을 꽤 오래 했기 때문에 손 주변, 손목, 팔목이 더러운 편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베는 방식의 자해를 할 때는, 지방층이 보일 때까지 하지 않으면 6개월 안에 거의 자해흔이 사라진다. 그리고 근육층까지 보이도록 자해를 하면 신경을 건드릴 위험이 있다....
극렬한 정서적 반응 때문에 고통스러워서 자해를 하는 친구들은 충동적이고 하기 편한 자해 행위를 선호한다. 벽을 주먹으로 내려쳐서 손을 찢어버리거나, 주변의 단단한 물건으로 다리나 몸통을 찍어버리는 등이 몇 가지 예다. 일반 사람들은 주변에 있는 위험한 물건이나 물질에 대해 잘 인지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보통 중증 정신질환자가 되면 그런 것이 모두 잠재적 자해 도구로 보인다. 사실 볼펜, 핸드폰, 손거울, 향수병, 욕실 세정제, 세탁세제 이런 것들 다 전부 마음만 먹으면 매우 위험한 물건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자살 위험이 있는 환자들이 입원해있는 폐쇄병동은 그렇게 엄격하게 반입 물건을 관리하는 것이다.
폐쇄병동의 반입 물건 제한에 대해서는 이 글을 참고하면 된다.
2022.09.15 - [BPD로 살아가기] - 삼성서울병원 정신과 폐쇄병동(안정병동) 입원 후기
만약 자해 가능성이 있는 주변인이 입원을 하지 않았는데, 곧 자해를 할 것 같은 느낌이 있다면, 차라리 자해에 대해 언급하고, 만약 자해를 한다면 어떤 물건으로 자해를 할 건지 생각의 흐름을 바깥으로 내뱉게 하고, "네가 자해를 하면 나는 슬플 거야" 식으로 그 사람을 지지해주는 발언을 하면 오히려 도움이 될 수 있다.
자살 위장 행위에 대해서
BPD 환자들의 자살 위장은, 위장이라는 말을 딱 들었을 때의 느낌과 달리 성공 확률도 낮지 않다. 왜냐하면, 많은 비피디 환자들이 타인이 자신을 평가(비판)할 것이라는 생각 아래 수치심을 느끼는데, 이는 다른 사람이 자신의 행동을 자살 시도가 아니라 자살하는 척, 이라고 생각할까봐 너무 두렵다는 감정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보통 경계성 인격장애 환자들은 정말 전혀 죽을 수 없는 바보같은 자살시도( 예를 들어 치사량이 엄청 엄청나게 높은, 요즘의 수면제 계열을 100~200알 정도 복용)를 하지 않는다. 대신 이 정도의 행위는 정말로 죽는 것이 확실한 행위로 알려져 있고, 내가 이것을 시도하면 사람들이 내가 매우 위험한 상태에 있다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에 관심을 가지고 내게 돌봄을 제공할 수도 있겠다, 내가 아프니까 나를 더 이상 미워할 수 없겠다. 하는 그런 자살 시도 방법을 쓴다. 누가 봐도 자살하는 척으로 보이는 행위를 하면 그것은 아주 창피한 일이기 때문에, 죽기에 확실한 방법이지만 정말로 죽지는 않을 정도의 그 간당간당한 경계선(이래서 이름이 경계선인가? 갑자기 웃기다) 위에서 자살을 시도한다. 그러니까 비피디 환자들은 자살 위장을 들키면 너무 수치스러울 것이라는 감정 때문에 자살과 생존의 경계에서 줄타기를 한다. 그로 인해 자살에 실패하고 치료와 돌봄을 받으면 환자들의 입장에서는 자살 위장이고, 성공하면 그냥 죽는 것이다.
자살 시도
또 자살 위장뿐만 아니라 그냥 자살 시도 행위도 잦은데, 그것은 경계성 인격장애 환자들의 생이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사소한 일에도 정서가 극렬하게 반응하고 기분이 날뛰는 것은 유쾌한 경험이 아니다. 비피디 환자들은 모두 공감하겠지만, 하루에도 세네 번씩 웃었다 울었다를 반복하고, 충동적이고 유해한 행위들 때문에 삶이 이미 반쯤 망가져 있고, 내가 치료를 받아서 나아질 수 있겠다는 확신도 없고, 소중한 사람, 나아가 세상이 나를 버렸고, 남들은 나를 항상 거부하거나 비판하고, 나는 무능력하고 사람들은 나를 나쁘게만 보고 있고, 나는 계속 내가 텅 비었다는 느낌으로 살아간다. 계속 이렇게 생각하게 되면 결국 죽는 게 사는 것보다 훨씬 좋은 선택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또, 극단적인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나타나는 일시적인 편집증과 이인증(해리 증상) 등은 내가 살아있는지 죽었는지 이게 꿈인지 아닌지를 의심하게 만든다. 보편적인 사람들이 꿈속에서 이건 꿈이다!라고 생각하고 꿈을 깨려고 하는 행위는 대부분 위험하다. 그 위험한 행위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
BPD 환자들의 자살 위험은 통계적으로 일반 인구의 40배에 이르며, 자살 사망률은 BPD로 진단받을 경우, 10% 정도이다. 이 통계에 대해서는 글 마지막에 참고 링크가 있다. 또, 이런 자살사망률은 기분장애, 조현병, 중독 장애들이랑 겹쳐질 경우 비약적으로 높아진다. 국가는 왜 이렇게 치사율이 높은 질환의 환자들을 그냥 놔두나 몰라... 막상 나만 해도 얼마 전에 응급차에 실려가서 소생실에 있었는데.. 그치만 지금은 아주 안전하고 행복하게 컴퓨터 앞에 앉아서 게임을 하며 블로그 글을 쓰고 있다.
7. 엄청나게 빠른 기분 변화 및 통제하기 어려운 강렬한 정서
보통 이 진단 증상은 조울증과 오인되는 경우가 많은데, 조울증은 보통 우울 삽화와 조증 삽화가 일정 주기를 가지고 반복된다. 그리고 그 주기는 꽤 길다. 보통 1년에 2~3번 정도 각각 우울증, 조증이 나타난다. 보통 우울증 삽화와 조증 삽화가 반복될 경우 1형 조울증, 우울증 삽화와 경조증 삽화가 반복될 경우 2형 조울증으로 진단한다. 그리고 급속순환형 양극성장애가 있는데, 급속순환형은 1년 동안 우울삽화와 조증삽화가 각각 4회 이상일 때, 그러니까 약 8번 이상의 파도를 겪을 때 급속순환형 우울 장애가 된다.
다시 말하자면, 조울증(양극성 장애)의 진단 기준에 따르면, 아무리 빨라도 조증과 우울증의 반복은 최소 한 달 이상의 기간마다 찾아온다.
사실 그 외에 경계성 인격장애 환자들이 가장 많이 오진되는 질병은 순환형 기분장애이다. 왜냐하면 순환형 기분장애는 경계성 인격장애처럼 기분 변화의 주기가 매우 짧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통 순환형 기분장애는 경미한 조증과 경미한 우울증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한마디로 많은 비피디 환자들처럼 극렬하고 통제하기 어려운 감정이나 분노로 고통받는 일이 별로 없다. 경계성 인격장애자들은 유기, 거절, 비판으로 느껴지는 일을 겪으면 자살과 자해 행위에 이를 정도로 고통스러워한다. 또 이는 통제할 수 없는 일이다. 또 다른 진단 기준을 생각해 봤을 때, 경계성 인격장애와 순환형 기분장애를 잘 구분해서 진단하고 치료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비피디 환자들이 가진 이 7번의 진단 기준은 사실 1번 진단 기준과 함께 거의 비피디 환자들의 핵심을 설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너무나 심한 정서의 날뜀 때문에 비피디 환자들은 엄청나게 고통을 겪는다. 특히 1번의 일이 벌어질 경우 통제하기 어려운 엄청난 감정기복을 겪게 되는데, 이 감정 상태 때문에 사실 나머지 진단 기준의 일들이 다 벌어진다고 말해도 큰 무리가 없다. 처음 좋은 사람을 만나면 기분이 너무 좋기 때문에 그를 이상화하며 친해지고, 그가 사소한 잘못을 하면 너무나 상처를 받기 때문에 격렬한 분노를 터뜨리며 비난하고, 또 여러 가지 일로 기분이 좋아지면 다시 그를 이상화하고 이런 식의 일이 벌어진다. 물론 보통은 그 사람을 좋아하거나(애착 대상으로 여기는 등) 중요한 사람(업무상 자신을 인정해주는 대상 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비피디의 증상이 나타나서 이상화와 평가절하를 하는 것이다. 비피디 환자라고 해서 딱히 일상 반경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이런 증상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이 진단 기준의 정말 중요한 진짜 핵심은, 보통 그 감정이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부적절하다는 것은 일반인 기준에 보기에 "그거 그렇게 화낼만한 일이야? 상처받을 만한 일이야?" 같은 말이 나오는 일들 때문에 BPD 환자가 고통받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비피디 환자들이 강렬한 정서적 반응을 보이는 일은 당사자가 아닌 사람이 보기에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같은 비피디 환자들은 전부 이해한다. 왜 그렇게 기분이 나빠지고 좋아지는지, 어떤 점에서 그 감정이 생기는지 알기 때문에, 서로를 잘 이해하고는 한다.
사실 감정 기복이 심하다고 해서 모두 BPD 환자가 되지는 않는다. BPD로 진단받으려면 아주 사소한 일에도 손이 떨릴 만큼 화가 나거나, 죽고 싶을 만큼 수치스럽거나 우울하거나 슬퍼지거나, 또 사소한 일에도 기분이 너무 좋아서 갑자기 에너지가 넘치는 듯한 기분이 되는 증상이 나타나야 한다. 하지만 사람에 따라 분노, 슬픔, 고양 등 어떤 감정에 가까운지는 다 다르다. 여타 성격장애들이 대부분 그렇듯 경계성 인격장애도 보통 청소년기나 성인기 초기에 발발하는 비율이 높다. 내 경우를 예로 들어보면 나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이런 감정 상태 때문에 고통받아 왔다. 아침에 학교를 갈 때는 잠을 더 자고 싶은데, 사람이 무척 많은 스트레스 상황에 가기 위해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 너무 끔찍하고, 학교를 가면 겪는 감정의 파도가 싫어서 죽거나 크게 다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매일 했다. 막상 학교에 가서 친구들과 떠들면 기분이 고양돼서 학교에 계속 있고 싶었다. 그러다가 수치스러운 감정을 느끼면 친구들 앞에서 손목을 긋고 싶었다. 하루에 기분의 폭이 최소한 열 번은 왔다갔다 했다. 그런 일상을 보내고 집에 오면 너무 지쳐서 컴퓨터 앞에서 웹서핑을 하거나, 만화책을 보거나, 잠만 잤다. 특히 잠을 많이 잤다.
8. 부적절한 격렬한 분노 및 분노 조절 어려움
이 진단 기준은 비피디 환자들을 분노조절장애로 오진하게 되는 큰 원인 중 하나인데, 경계성 인격장애와 오진을 피하기 위해서는 다른 진단 기준과 통합성을 잘 고려해서 진단을 내릴 필요성이 있다. 실제로 내 친구들은 분노조절 장애와 경계성 인격장애 진단을 함께 갖고 있는 경우가 몇 있는데, 내가 보기에도 친구들이 보기에도 이건 그냥 BPD의 증상이다....
비피디 환자들은 기본적으로 극단적이고 불안정한 정서를 가지며, 이는 분노 정서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또 마찬가지로 이 분노 정서도 상황에 맞지 않게 부적절하다. 8번의 진단 기준이 7번에 통합되어 있지 않고, 따로 있는 이유는 "분노"라는 정서와 이로 인한 부적응적인 행동이 비피디 환자들에게서 특히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보통 모든 인간이 분노를 겪으면 나타내는 신체 반응이 있다. 얼굴에 열감이 오르고, 맥박이 빨라지고, 동공이 확장되고, 호흡이 가빠지고, 몸에 피가 식는 느낌이 들고, 손발에 땀이 나고,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무엇보다 고통스럽다. 비피디 환자들은 사소한 일에도 이런 분노 상태를 자주 겪는다. 물론 당사자에게는 전혀 사소하지 않고, 엄청나게 상처가 되는 일일 것이다. 이걸 어떻게 표출하느냐는 환자들마다 다른데, 나 같은 경우는 보통 계속 울다가 자해를 해서 진정시키거나, 그렇지 못하면 과호흡이 와서 발작을 하거나 정신을 잃고는 했다. 나는 발작 직전이 되면 시야가 갑자기 어항처럼 동그래지면서 노랗게 변하는데, 이 때 효과가 가장 빠른 진정제를 먹으면 그나마 증상을 조금이나마 진정시킬 수 있었다. 경험상 아티반과 인데놀을 씹어서 잘게 만들어 삼키는 것이 것이 가장 효과가 빠르고 좋았는데, 사실 이런 증상을 맞닥뜨리게 될 경우 약을 스스로 챙겨먹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다른 친구들은 이런 증상이 올라오면 평범하게 분노한 사람처럼 행동하기도 하지만, 자해나 자살 시도를 하기도, 물건을 던지거나 타인에게 폭력을 쓰기도 한다고 했다. 결국 자기한테 해를 입히거나 타인에게 해를 입히는 것이다. 비피디 환자들의 분노는 혼자 삭혀지는 일이 없다고 보면 되고, 무조건 밖으로 어떻게든 표출된다. 분노를 조절하기 어렵다는 것은, 정서를 조절하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행동을 조절하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일이 닥칠 때 가장 최선의 행동은 정서가 극단으로 치닫기 이전에 우선 비상약(필요시 약)을 잘 챙겨먹는 것이지만, 만약 이게 어려울 경우 DBT(변증법적 행동 치료)를 배운 사람이라면 그 기술을 적용해볼 수도 있다. 물론 그것도 어려운 일인데... 사실 나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일이라 어떻게 하라고 조언을 하기가 어렵다.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상황이 닥칠 때 혼자 있으면 매우 위험하다. 정말로 이 때 혼자 있으면 매우 매우 위험하므로 그나마 정신을 붙들 수 있을 때 전화라도 해서 주변 사람에게 와달라고 해야 한다. 차라리 사고를 칠 가능성을 줄이도록 사회적 제약이 있는 사람이 많은 공공장소에 가는 것도 방법이다.
환자들은 분노를 폭발적으로 표현하고 난 이후에는 자기혐오, 수치심, 죄책감을 느끼는 데, 이런 생각들 때문에 비피디 환자들은 모든 건 다 내 잘못이고, 내가 나쁘다는 생각을 지속적으로 하게 된다. 결국 이 정서는 쌓이고 쌓여서 다음 정서 문제와 분노 폭발의 동력이 된다. 이 악순환을 해결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9. 극단적 스트레스에 의해 발발하는 해리 증상과 편집증
이 증상은 경계성 인격장애 환자들을 조현병(구 정신분열증)으로 오진받게 하는 진단기준 중 하나이다. 비피디 환자들은 유기불안, 비판받는 상황 등 견딜 수 없는 스트레스 상황에 놓이면 자해, 자살, 충동 행위 뿐만 아니라 방어 기제로, 보통 사람들은 겪지 않는 소위 "정신병자"들만 겪는다고 일컬어지는 증상을 겪는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해리 증상인데, 해리 증상은 간단히 말하면 인격이 분리되는 듯한 증상을 가리킨다. 환자들은 이것을 꿈꾸는 듯한 느낌, 로봇이 된 것 같은 느낌,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 온몸의 감각이 이상한 느낌, 다양한 언어로 표현하기도 한다. 종종 완전히 해리가 된 상태가 진행될 경우 기억상실 혹은 희미한 기억 상태를 동반하기도 한다. 또 이 상태에서 환시, 환청, 기이한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
간단히 말하면, 비피디 환자들은 평소에 조현병 환자가 아니지만, 스트레스 상황에 놓이면 조현병 환자들이 겪는 정신증적인(위에 말한 소위 "정신병자"같은) 증상을 겪는다고 보면 된다. 조현병 환자와 비피디 환자들이 다른 점은, 조현병 환자는 이런 증상이 질병의 기본적 상태이기 때문에 치료를 요하지만, 비피디 환자들은 그 시점의 스트레스 상황을 해소하는 것만으로도 증상이 사라진다. 따라서 비피디 환자의 이런 증상에 필요한 것은 평소에 스트레스 상황을 잘 대처할 수 있게 인격장애 증상을 완화하는 치료를 하는 것이지, 정신증적인 증상을 치료할 필요는 없다. 여러 번 말하고 있지만, 내 주변의 경험을 종합해 쓰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의료 정보가 아니다. 하지만 내 주변 비피디 환자들은, 극단적인 스트레스를 받을 때 이런 증상이 나타나는 것이 그 당시 스트레스 상황에서 정서적 고통과 자해 행위 등을 경감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나는 이런 해리 증상이 발발하면, 제 3자의 시선에서 나를 바라보는 장면으로 시점이 바뀌는데(예를 들면 내 영혼이 천장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시점) 이럴 경우 정서적 고통에서 잠깐이라도 벗어날 수 있었다. 또, 내가 겪는 환시의 경우 보통 아름다운 자연물, 노을, 숲, 파도 등이 눈앞에 떠오르는데 그 장면을 보고 있으면 영성 체험과 비슷한 느낌이 나서 몸의 감각이 전부 환기되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받을 수가 있었다. 물론 이걸 모든 환자들에게 일반화할 수 없고, 모두가 겪는 증상이 다들 다를 것이다.
마찬가지로 비피디 환자들은 스트레스 상황에 놓이면 조현병 환자들이 흔히 보이는 편집증(구 피해망상증) 증상도 보이는데, 그 상황에서 벗어날 경우 증상도 해소되는 경향이 있다. 편집증은 의처증, 의부증, 타인이 나를 미워한다는 확신, 내 주변이 나를 공격하고 있다는 느낌, 타인들이 모두 나를 쳐다본다는 느낌, 여러 가지 양상으로 나타나는데, 유기불안 때문에 나타나는 스트레스 라면 보통 연인이나 애착 대상에 대한 의심이 가장 흔한 편집증 증상인 것 같다. 편집증을 대처하는 방법은 환자마다 각기 다르지만, 8번의 진단 기준처럼 편집증의 대상에게 격렬하게 화를 내기, 질투 감정, 울면서 애원하기 등 정서를 폭발시키는 대처 양상이 주로 많은 것 같다. 이런 편집증 증상은 유기불안 대상과의 관계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상대에게 부담을 주기도 하는데, 그래서 이런 증상을 나타내고 나서 비피디 환자들은 내가 이런 증상을 나타냈기 때문에 또 질려서 나를 버리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을 갖게 되고, 악순환이 시작된다. 주변인은 비피디 환자들에게 정서적 거리를 갖고 말려들지 않음과 동시에 자신이 그를 절대로 버리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주는 것이 관계를 유지하는 데에 정말로 중요하다.
이 글은 내용을 쓰고 덧붙이고 고치는 데에만 거의 몇 주가 걸릴 만큼 많은 공을 들였다. 이 블로그에 쓴 글 중에 가장 시간을 오래 들인 글이다. 뭐 조회수는 별로 안 나오겠지만...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글은 의료적 정보가 아니고, 임상 현장에서 사용되는 진단 기준에 따라 설명을 덧붙이고, 당사자인 나와 내 친구들을 일반화해서 쓴 글이다. 다만 다른 당사자가 이 글을 읽는다면 조금의 팁이라도 얻어가면 좋겠고, 비피디 환자를 지인으로 둔 사람이라면 이 병이 이런 병이구나, 이런 것들을 겪고 있구나 하고 알게 되었으면 좋겠다.
참고 링크(추가 중)
참고 1 : Msd 메뉴얼
참고 2 : 학지사 이상심리학 시리즈 "경계선 성격장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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